※Caution※

B루트 기반 / 아리아케가 기억을 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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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꿈이었다. 원형으로 된 커다란 재판장 가운데에 선 당신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꿈. 죄수복을 입은 채 포승줄에 매인 당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보면, 배심원처럼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검은 그림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얹고 있었다. 대부분 당신을 비난하는 말이었으나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이 살인자! 틈바구니에서 절규 섞인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감옥에 평생을 가둬두거나 목숨으로 죗값을 치르는 건 죄질에 비해 너무 가볍지 않습니까? 죄인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빼앗읍시다! 남자의 억센 목소리가 들렸다. 땅땅. 점점 과열되는 웅성임 뒤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당신의 바로 맞은 편에 묵묵하게 앉아있던 그림자가 인간의 음성을 뱉었다.

선고한다. 피고인 아리아케 쇼타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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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숭숭한 표정으로 꿈에서 깬다. 바깥에서는 익숙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바깥이 희푸른 것을 봐서는 이제 막 오전 여섯 시나 되었을까. 가장 먼저 옆자리를 살피면, 익숙한 얼굴이 색색거리며 느린 숨을 뱉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안도감을 느낀다. 오늘까지는 일정을 비워두었으니 모처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였다.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그의 몸 곳곳에 자신이 새겨놓은 흔적이 가득했다. 애욕. 집착. 질투. 지저분하게 눌어붙은 그것들을 바라보다 조용히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다. 올바른 애정의 전달법을 모르는 탓이었다. 그저 당신이 가르치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저 행할 뿐이었으니.

그런 저열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욕실로 향했다. 씻고 나서는 식사를 준비할 생각이다. 정석적인 식사는 어려웠고 적당히 구워낸 식빵에 계란과 잼을 곁들일 예정이었다. 보송보송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느리게 눈을 감떴다. 단정하게 고쳐 입은 셔츠 소매를 걷고 불 앞에 서면, 기승을 부리던 여름 더위가 꺾이고 가을이 오고 있음에도 쉽게 땀이 흘렀다. …어. 식사 준비가 막바지에 달했을 무렵 뒤에서 들리는 작은 탄성에 고개를 돌린다. 소리가 난 자리에는 아직 잠옷 차림을 한 그가 서 있었다. 이제 막 깨어서 잠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얼굴을 하고 있어야 건만, 그는 어째서인지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에…? 네에….”

자신의 물음에 일단 고개를 주억거리지만, 그는 여전히 경계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방에 들어와 있는 모습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텐데 무슨 일이지. 미묘한 반응에 눈썹을 얕게 들썩이고는 잠시 닫았던 입을 연다.

“아리아케 씨, 어디 불편하신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아니요, 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서….”

“…?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제 이름이 아리아케 인가요? 여기는 어디고, 당신은 또 누구신지 도무지….”

죄송해요…. 점점 작아지는 말소리 끝에 어쩔 줄 모르는 사과 말이 따라붙는다. 그 말에 벙찐 채 당신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느란 눈썹이 팔자로 내려가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나 벌어지는 게 아니었나? 혼란스러웠다. 머리를 다친 것도, 그렇다고 무슨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데 하룻밤 새에 기억을 다 잃어버리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미간을 팍 구기자 노골적인 표정 변화에 놀란 그가 연신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불편함만 더해질 뿐일 테다. 조촐하게 차려진 식탁 앞의 의자를 쭉 빼어서 앉으라는 듯 손짓하면, 당신은 잠시간 망설이다가도 순순히 그 자리에 앉았다. 물을 부어둔 커피가 다 내려왔는지 쌉쌀하고 고소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일단 드시죠.”

“네…, 감사합니다….”

내밀어진 머그잔을 양손으로 받아든 그가 잔 근처에 코를 대고 몇 번 킁킁거리다 이내 입을 가져다 대었다. 앞니를 살짝 내어 그릇의 테두리를 앙 물고, 천천히 고개를 치켜든다. 저도 잘 알고 있는 당신의 버릇이었다. ―믿어도 되는 건가? 불현듯 그런 의심이 들었으나 이내 작게 고개를 저어 떨쳐낸다. 찜찜하긴 하지만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거나 저를 놀린다고 해서 특별히 당신에게 돌아가는 이익은 없다. 어차피 자신은 이미 그에게….

“…저기.”

상념을 찢고 들어오는 목소리에 묵묵하게 네, 하고 답한다. 작은 손에 들린 식빵에는 몇 차례 베어 문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짧은 침음을 흘리다가 턱을 안쪽으로 당기며 눈을 슬그머니 치떴다.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오오사키 입니다.”

애써 꺼낸 첫 번째 질문이 고작 자신의 이름을 묻는 거라니. 지독한 순진함에 맥이 탁 풀렸다. 에헤헤…. 당신은 실없이 웃으며 바삭하게 구워진 식빵의 테두리를 입에 물었다. 무엇에 홀린 듯 볼록하게 뺨을 부풀리고 음식을 씹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제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 당신은 훨씬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이,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름은 아리아케 쇼타로. 나이는 올해로 스물일곱 살. 아내와는 두 해 전에 사별. 하는 일은 장례지도사이고 여기는 당신의 별장이며 어머니와 여동생이 있지만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는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모두 말해주고 나면, 작은 입술이 오오사키 씨는요? 하고 되물어왔다. 그 질문에 솔직하게 답한다.

오오사키 히이로.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스물네 살. 하는 일은 사설탐정이며 거주지는 히라츠카. 그리고 당신과의 관계는… 의뢰인과 사용인. 그렇게 말했다. 뻔뻔스러운 거짓말에도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는 모습을 보며 미묘한 죄악감을 느낀다. 하지만 아무리 사실이 그렇다고 한들 기억을 잃은 사람에게 대뜸 우리는 연인입니다, 같은 말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한 번 거짓말이 시작되자 그 뒤로는 진실을 털어놓을 수 없게 되었다. 탐정님들은 직접 집에서 식사까지 챙겨주시기도 하나요? 하는 물음에 한참 동안 스토커에게 시달리느라 경호를 겸해서 고용되었다고 하자 그는 아아, 하고 이해했다는 소리를 내었다. 당신은 제 불충분한 설명만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었다.

의뢰인과 사용인이 데이트를 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으니 그가 씻으러 간 사이 식당에 전화를 걸어 예약을 취소했다. 때에 늦지 않게 도시락을 사다 두고는 낮 동안에는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보이진 않는지 확인하겠다는 핑계로 잠시 정원에 나가 주위를 설렁설렁 둘러보며 담배를 몇 대 태웠다. 어떻게 해야 당신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을까.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 하나로 가득 찼다. 누구에게 물어서 답이 나오는 일이라면 좋으련만.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오히려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다. 「나」를 모르는 당신과 계속 함께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당신이 영원히 이 상태로 남아버린다면, 「나」는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 것인가. 불안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머지않아 온몸이 검붉은 상념의 늪에 잠긴다. 그동안 애써 부정했던 감정들이 마구잡이로 쏟아져나왔다.

그리고, 머지않아 결심한다. 오늘이야말로 당신과 함께 죽으면 된다고.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순결한 천사인 채로, 그대로 조용히 눈을 감으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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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정리하고 나면 벌써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 낮이 짧아진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상하리만치 시간이 빨리 가는 기분이었다. 장갑의 목 부분을 당겨 반듯하게 정리하고는 습관적으로 붙잡은 문고리에서 손을 뗀다. ―똑똑. 정중하게 현관문을 두드리면, 이내 평상복 차림의 당신이 나와 문을 열어주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뱃속 어딘가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은 간지러운 감각이 들었다. 자신이 밖에서 시간을 죽이는 동안 당신은 제 나름대로 기억을 찾아보려 노력한 건지 거실 테이블 위에 오래된 앨범이 올라와 있었다. 언젠가 당신이 보여준 적 있는 물건이었다. 아버지의 초상부터 시작해 두 번째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까지….

그 안에는 갖가지 모습의 아리아케 쇼타로가 담겨있었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라면 감상에 젖을 수도 없을 텐데 당신은 그것을 넘겨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거운 결심을 마쳤음에도 자신은 여전히 아리아케 쇼타로가 궁금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차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앗, 제가 해도 되는데…. 안 계신 동안 여기저기 찾아봤거든요.”

“괜찮습니다. 아직 많이 혼란스러우실 텐데 조금 더 쉬어두세요.”

완고한 거절에 당신은 하는 수 없다는 듯 걸음을 물린다. …쓴맛을 감추려면 설탕을 타는 게 좋겠지. 재킷 안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찻잔에 내용물을 털어 넣는다. 잘게 부숴놓은 라보나 알약이었다. 따뜻한 물을 조금 붓자 하얀 가루는 곧 흔적도 없이 녹아들었고, 그 위로 설탕을 몇 숟갈 넣고 차가 우려지기를 기다린다. 다시 만났던 날 당신이 제게 말했던 것처럼 자는 듯이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당신을 보내줄 생각이었다. 뿌옇게 흰색을 띤 잔 안에 다홍빛 찻물을 채웠다. 다행히 크게 티가 나는 것 같진 않았다.

“…아, 감사합니다.”

작은 쟁반에 올려두었던 찻잔을 앞에 내려놓으면, 당신은 아무 의심 없이 그것을 손에 들고 온기를 나눠 받는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맞은편에 앉아 제 몫의 차를 몇 모금 마셨다. 향긋하고 쌉싸름한 맛이었다. 분명 무슨 이름이 붙은 홍차였는데 잘 기억이 나진 않았다. 차를 마시는 척하며 당신에게 시선을 둔다. ―꼴깍. 별다른 의심 없이 움직이는 목울대를 보며 반쯤 안도했다. 뭐, 기억이 없다면 본래 나야 할 맛이 어떤지도 모르겠지만.

“그… 오오사키 씨. 내일도 오시나요?”

“네.”

오지 않을 날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잡는다. 약효가 제대로 돌기 위해서는 적어도 한 시간 정도는 있어야 할 테고, 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당신과 함께 할 생각이었다. 창 너머로 들어온 노을빛에 약지에 끼인 반지가 반짝였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면 무색해질 물건이건만, 시선이 닿자 얕게 짜증이 치민다. 다음 생까지 가져갈 수 없게 어딘가로 흘려보내리라. 눈을 가늘게 뜨고 반쯤 비워진 잔을 내려놓는다. 혀 위에 남은 쌉쌀함을 느끼며 느리게 숨을 뱉었다.

“…저, 스토킹을 당한 지 오래됐다고 하셨죠.”

물음에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짓말이라는 걸 눈치챈 건가. 말없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그가 시선을 맞춰왔다. 불안과 초조 따위가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저 작은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기에 그러는 걸까. 경박한 호기심을 잡아 누르고 그저 침묵한다. 제가 굳이 말을 얹지 않아도 당신은 곧 모든 걸 털어놓을 테니까.

“어느 정도였던 건가요?”

“최근에는 집 근처까지 따라온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들은요?”

“자세한 내용까지는 모릅니다. 전달해주신 건 말씀드린 게 전부입니다.”

적당한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해 최근 들어 위협이 심해지는 바람에 제가 당신의 집까지 드나들게 되었다고 말하긴 했으나, 자신의 설명대로라면 지금의 당신과 자신은 안면을 튼 지 달랑 나흘 된 사이였다. 그래서 자세한 건 모른다. 그렇게 대충 둘러대고 나면 당신은 한층 울적한 표정이 되어 조심히 말을 이었다.

“…오오사키 씨. 저, 그 사람한테 분명 무슨 짓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예?”

“그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것」들이 남아있을 리 없잖아요….”

하얀 손가락이 티셔츠의 목을 아래로 주욱 늘어뜨리면, 지난밤 자신이 새겨놓은 새빨간 울혈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그 아래로도 온통 잇자국이며 손자국 따위가 남아있을 것이다. 샤워 중에 발견한 것을 지금까지 고민했던 모양인지 그는 꽤 수심이 깊어 보였다. …일이 이런 방향으로 갈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런…, 이런 흔적이 온몸에 남아있어요.”

“아리아케 씨.”

“…지저분하고, 불결해요.”

실은 오오사키 씨도 제가 더럽다고 생각하고 계시죠? 삽시간에 일그러진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온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슨 답을 건넨단들 당신에게는 이미 닿지 않을 거였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차라리 처음부터 솔직하게 털어놓았으면 좋았으련만. 엉망으로 엎질러진 물을 눈앞에 둔 채 어쩌지도 못하고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질 않아요. 흐윽…. 저는, 대체 어떻게 해야….”

떨어진 눈물이 말간 손등을 적신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벌벌 떨리는 작은 몸을 품에 가득 끌어안고 싶었다.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모두 거짓말이었다고 털어놓고 싶었다. 당신이 그렇게 된 건 다른 누가 아니라 전부 자신의 탓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아니. 아니다.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했다. 순식간에 싸늘하게 식은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제 계획대로라면, 아리아케 쇼타로는 그저 무고한 피해자로 남아야만 했다.

“도와주세요, 오오사키 씨….”

그랬는데. 애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당신이 울음소리를 참으려는 듯 아랫입술을 꾹 감쳐물었다. 일견 허탈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 모습에 가슴이 아렸다.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무방비한 모습에 뱃속에서 비뚤어진 욕구가 끓는다. 탐하고 싶다. 범하고 싶다. 당신의 입술을 베어 물면 어떤 맛이 나는지. 깊고 내밀한 곳을 범하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자신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 섬에서 당신에게 입을 맞췄던 그 순간부터. 무슨 수를 써도 절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집어 먹고 낙원에서 추방당했다는 최초의 인류처럼, 저 역시 그 섬에서 당신이라는 지옥에 스스로 몸을 던진 것이다.

울먹이는 입술 위로 마른 입을 겹쳤다. 당신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목에 팔을 둘러 끌어당기며 가쁘게 뱉던 숨을 차츰 진정시켜가고 있었다. 혀를 내어 말캉한 살을 핥으면, 당신은 언제나처럼 입을 열어 제게 자리를 내주었다. 토끼는 사랑이 없으면 죽어버린다고 했던가. 언젠가 들었던 낭설을 떠올리며 그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몸의 기억까지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본능적으로 제 혀를 좇는 움직임이 기민하다. …흐응. 뒤통수를 받치고 혓바닥을 진득하게 마주 비빌 때 기분 좋게 신음하는 버릇까지 여전했다. 목에서부터 천천히 내려온 손이 가슴께를 훑고 지나와선 팔뚝을 붙들었다. 당신은 가쁘게 숨을 할딱이면서도 절대로 먼저 고개를 물리지 않았다. 아마도 이게 마지막이 될까 봐 불안한 거겠지. 여전히 떨고 있는 가녀린 몸을 달래며 맞붙은 입술을 천천히 떼어낸다. 끈적한 실타래처럼 늘어지던 타액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떨리는 속눈썹 아래로 드러난 빨간 눈동자가 흐릿하게 자신을 향한다.

“…해 주세요, 오오사키 씨.”

“…….”

“오오사키 씨라면, 괜찮으니까….”

슬슬 약 기운이 도는지 들려오는 목소리가 조금 나른했다. 무릎 위에 작은 몸을 올라 앉힌 채 장갑을 벗었다. 언젠가 당신이 말한 적이 있었다. 야에네 항에서 자신을 처음 봤을 때부터 무언가 느껴졌다고. 지금도 그런 게 아닐까. 기억에는 없지만 무의식에 남아있는 어떤 것이, 당신을 나에게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연신 짧은 입맞춤을 이어가며 천천히 등허리를 다독이다 오목하게 들어간 틈새로 손을 집어넣었다. 대범한 움직임에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였으나 저를 말리거나 밀어내지는 않았다. 엉덩이골 사이로 손가락을 가져다 대면, 여전히 지난 밤의 여파로 말랑하게 부어오른 입구가 만져졌다. 그 위를 몇 번 덧그리다 손가락을 밀어 넣는다. 노골적인 자극에 가슴팍에 닿은 손이 어쩔 줄 모르고 귀엽게 꼬물거리는 것에 욕지거리가 튀어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아리아케 씨….”

최대한 절제된 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어느새 품에 안겨든 당신이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채 어깨를 달싹이고 있었다. 얇은 옷감 너머로 전해지는 빠른 심음이 사랑스러웠다. 망가뜨리고 싶다는 비뚤어진 욕망을 애써 무시하며 이미 반쯤 풀어진 내벽을 헤집을 때마다 아래에서 히잇, 헤엑, 하는 가쁜 숨소리가 들렸다. 금세 녹진하게 젖어 들어 입에 물린 손가락을 강하게 빨아올리는 구멍을 느끼며 이를 꽉 물었다. …이런 몸을 다른 누가 탐하게 둘 리가 있겠는가. 순간 치미는 욕정에 참지 못하고 좁은 내벽을 빠르게 들쑤셨다.

“아! 힉, 으읏…!”

가슴께에서 꼬물대던 손이 제 셔츠 자락을 꽉 움켜쥔다. 흠칫거리는 어깨를 쓸어주다가 이내 턱을 쥐고 당겨 입술을 겹쳤다. 이미 당신의 숨통을 죄고 있음에도 여전히 부족했다. 호흡을 빼앗으며 손가락을 뿌리까지 밀어 넣고 난잡하게 흔들었다. 우읍, 흑…!! 그 얼마 되지 않는 자극에 작은 몸이 어렵지 않게 절정한다. 빳빳하게 힘이 들어간 혀를 집요하게 빨아당기며 뜨거운 점막을 몇 번 더 휘젓고 나서야 손을 물렸다. 손 틈새에 진득한 체액이 한가득 남아있었다.

“오오사키, 씨….”

절정감이 쉽게 가시지 않는지 나른하게 감긴 눈꺼풀이 간헐적으로 파르르 떨렸다. 약을 먹여두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마 맨정신이었다면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범해져서 이렇게 밝히는 몸이 되었다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자기혐오를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의 찻잔을 가져다가 내용물을 머금은 채로 다시 입술을 맞붙였다. 입을 벌린 채 할딱거리느라 그새 목이 말랐는지 당신은 아무 저항 없이 제가 넘겨주는 것을 꼴딱꼴딱 받아 삼켰다. 땀에 젖은 손으로 제 뺨을 감싸 쥐곤 달콤한 설탕 맛이 남은 입안을 이리저리 핥으며 무언가를 갈구하듯 굴기도 했다.

그에게 입을 내어준 채 허리춤을 잡아당겨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린다. 그새 사정했는지 반쯤 선 성기 위에 희끗한 체액이 가득 묻어있었다. 어렵지 않게 발목을 빠져나온 그의 옷을 바닥에 내려두고 팽팽하게 부푼 섶을 풀어헤쳤다. 그리고는 서로의 성기를 맞붙인 채 한 손에 쥐고 쓸어올리기 시작했다. …읏, 윽. 자극이 강해질 때마다 작은 혀가 위아래로 들썩이며 맞닿은 입술 너머로 가느랗고 뜨거운 숨을 흘려 넣는다.

“우읍, 흐….”

그의 하반신이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제 허벅지에 비벼진다. 체중을 실어 회음부와 구멍을 문질러대는 모양새가 음탕했다. 자신이 아는 당신과 한치도 다르지 않은 행동에 빠르게 열이 뻗친다. 의식이 온전치 않은 상태여서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얇은 옷자락 위로 봉긋하게 튀어나온 유두를 꼬집고 비틀었다. …흐읏! 전기라도 통한 마냥 작은 몸이 몇 번 들썩이다가 허리를 잘게 떨었다.

“오오,사키 씨…. 얼른….”

몽롱해진 눈으로 저를 보며 손을 내려 엉성하게 마주 쥔 성기를 더듬거리던 그가 머지않아 참기 힘들다는 듯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애교인지 애원인지 모를 행동이었다. 늘어진 몸을 살짝 받치고 벌겋게 피가 몰린 살덩이를 입구에 가져다 댄다. 그대로 힘을 주어 골반을 쥐고 당기면, 곧 아래에서 녹을 듯한 열기와 함께 답답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녹진하게 젖은 내벽이 수축하며 무언가를 빨아내려는 듯 꿈틀거린다. 찐득하게 들러붙는 점막을 억지로 밀어 열고 들어가면, 머지않아 가장 깊은 자리에 귀두가 닿았다. 꾸욱. 힘을 주어 그 자리를 문질러 비비며 만족한 숨을 뱉는다. 아래를 꿰뚫리는 쾌감이 제법 강했는지 목덜미에 닿은 그의 턱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불규칙하게 들썩이는 등을 쓸어주며 골반을 틀어쥔 채 허리를 쳐올리면, 머지않아 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아학! 읏…, 흐으으….”

흐무러진 입에서 다 뭉개진 신음이 새었다. 작은 배 안을 가득 메운 빠듯한 양감에 연신 경련하면서도 기분 좋은 자리를 찾아 잘게 허리를 흔드는 모습이 간신히 눌러놓은 욕망에 불을 붙인다. …이 얄팍한 뱃가죽 안에 든 것들을 모두 엉망으로 망가뜨리고 싶었다. 단순히 흔적을 남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신의 육체도 정신도, 모두 다 제 발아래에 예속시키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름다운 당신을 박제해 영원히 남겨두고 싶었다.

“아리아케 씨….”

언제부터인가 자신은 울고 있었다. 무서웠다. 이 상태로는 당신에게 어떤 불순한 짓을 할지 모른다. 주체할 수 없는 애욕은 저주와도 같았다.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지 움직임이 느려진 몸을 붙들고 엉망으로 안을 범한다. 히극, 헥…! 거친 추삽질에도 오르가즘을 느끼는지 아래가 빠듯하게 조여들 때마다 엉덩이를 쥐어 잡고 구멍을 벌려가며 당신을 탐했다. 거친 움직임에 사방으로 튀기 시작한 말간 체액이 아랫배를 흥건히 적신다. 등줄기를 타고 어찔한 절정감이 끼쳐들 즈음엔 당신은 이미 의식을 거의 잃은 상태였다. 늘어진 몸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 꽉 다물린 틈을 귀두로 찔러 올렸다. 축 늘어진 양팔을 쥐어 잡은 채 힘을 주어 당기면, 품에 갇힌 몸이 강하게 퍼드득거리며 제 것을 빠듯하게 조여 물었다. 기둥이 잘려 나갈 것 같은 강한 조임에 묵직한 한숨을 뱉으며 좁아터진 안에 허락도 없이 파정했다.

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빼자 속절없이 흔들리던 상체가 제 쪽으로 쏟아진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성감은 느껴지는 건지 인형마냥 늘어진 작은 몸이 간헐적으로 경련했다. 오오사키, 씨…. 초점이 없는 눈을 하고 입을 벙긋거리던 그가 금방이라도 녹아 흐를 듯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른다.

“좋아,해요….”

“…….”

답하지 않는다. 차마, 답할 수 없었다. 당신은 나른한 신음을 흘리며 잠들 듯이 눈을 감는다. 아마 다시는 당신과 마주 볼 수 없으리라. 체온을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지 못 하리라. 좁은 틈에서 몸을 물려낸 오오사키가 흘러넘친 액체를 깔끔히 훔쳐내고는 서로의 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가냘픈 목을, 힘껏 눌러 조였다.

―베라.

저주를 사랑이라 부른 그 죄로,

당신을 규탄한다.

선악과/저주

P

I